2026-06-11 온라인뉴스팀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 최초 인정하며 한일 관계의 새 이정표 세운 대표적 온건파 정치인, 굴곡진 정치 인생과 아시아 평화를 향한 외교적 유산 조명

[익스퍼트인사이트 온라인뉴스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일본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죄를 표명했던 1993년 역사적인 ‘고노 담화’의 주역,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중의원 의장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일본 현지 유력 언론 및 주요 외신들의 일제 보도에 따르면, 고노 전 의장은 지난 6월 8일 병환으로 별세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유족의 뜻에 따라 이틀 뒤인 10일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자민당 내에서도 대표적인 온건 비둘기파로 분류되며 한일 양국은 물론 아시아 주변국과의 평화와 화합을 끊임없이 주창해 온 그의 죽음은, 단순한 일본 원로 정치인의 퇴장을 넘어 한일 과거사 문제의 중대한 상징적 인물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특히 일본 사회 내부에서 역사 수정주의적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는 현대 정치 지형 속에서, 평화를 외쳤던 그의 족적이 지니는 무게감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고노 전 의장의 정치적 유산 중 단연 가장 무겁고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바로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다.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관방장관 자격으로 발표한 이 담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운영, 그리고 위안부의 모집과 이송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한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과 인권 유린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공식 인정하며,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는 획기적이고도 진정성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최초로 국가 권력의 부당한 개입과 폭력성을 자인한 공식 문서로서, 이후 한일 양국 관계의 최저선이자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기준점으로 자리 잡았다. 비록 발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 극우 보수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정치적 반발과 지속적인 담화 수정 요구에 직면해야 했으나, 고노 전 의장은 생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담화의 진정성을 굳건히 옹호하며 국가가 저지른 역사적 책임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고노 요헤이 전 의장의 정치 인생은 단조로운 권력의 궤도라기보다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1937년 가나가와현의 유력 정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농림대신 등을 지낸 아버지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1967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후, 그는 청년 시절부터 자민당 내의 고질적인 부패와 파벌 정치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 개혁적이고 소신 있는 인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76년, 일본 정계를 뒤흔든 대형 뇌물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 등 부정부패에 극심한 염증을 느낀 그는 뜻을 같이하는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고 과감하게 당을 탈당하여 ‘신자유클럽’을 창당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는 부패한 보수 정치를 온전히 청산하고 깨끗하고 투명한 보수를 새로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으며, 당시 일본 사회와 유권자들에게 커다란 정치적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신자유클럽은 이후 현실 정치의 한계에 부딪혀 1986년 해산하고 그 역시 자민당으로 복귀하게 되지만, 이 시기의 치열했던 경험은 그를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정치인으로 성장시키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자민당 복귀 이후에는 과학기술청 장관, 외무대신, 부총리 등 내각의 주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탁월한 행정 능력과 정치적 역량을 입증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1993년 자민당이 창당 이래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며 정권을 상실했을 당시, 제16대 자민당 총재를 맡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당의 재건과 쇄신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이다. 그는 특유의 포용력과 온화한 리더십으로 당을 빠르게 안정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정권 탈환 직전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결국 총리직에는 오르지 못한 ‘유일한 총리 미경험 자민당 총재’라는 이색적이고도 아쉬운 타이틀을 영원히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는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2,029일 동안 중의원 의장을 역임하며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중의원 의장이라는 역사적인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 정치의 든든한 균형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중의원 의장 재임 시절 그는 여당과 야당을 아우르는 넓은 포용력과 특유의 합리성으로 의회를 원만하게 이끌었으며, 일본 사회가 자칫 극단적인 우경화 노선으로 치닫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에도, 주변국과의 심각한 외교적 마찰과 신뢰 붕괴를 강하게 우려하며 공개적으로 신중론을 펼치는 등 평화 헌법의 본래 정신을 수호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의 신뢰 구축을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일본이 국제사회, 특히 이웃 아시아 지역에서 진정으로 존경받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 국가가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고한 소신을 평생토록 굽히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평화주의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다사다난했던 삶에서 굵직한 정치적 족적만큼이나 대중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그가 겪은 개인적인 생사의 험난한 고비와, 그것을 함께 극복해 낸 눈물겨운 가족애의 일화다. 고노 전 의장은 2002년 오랫동안 앓아오던 C형 간염이 간경변으로 급격히 악화되면서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당장 신속한 간 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의 장남이자 현재 일본 정치권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고노 다로(河野太郞)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 선뜻 자신의 간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내어준 아들의 숭고한 결단과 헌신은 당시 일본 사회 전역에서 크나큰 감동과 훈훈한 화제를 모았으며, 성공적인 생체 간 이식 수술을 통해 고노 전 의장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정계로 복귀하여 의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인 요헤이는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대표적인 온건파인 반면, 아들 다로는 방위대신과 외무대신 등을 지내며 외교 안보 문제에 있어 상대적으로 강경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어 종종 두 사람의 뚜렷한 정치적 견해차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과 이념의 뚜렷한 차이조차도 그들의 끈끈한 천륜과 핏줄로 맺어진 깊은 인간적인 존경심을 결코 훼손하거나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으로 널리 전해진다.
고노 요헤이 전 의장의 타계 소식에 일본 정계를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 등 주변 아시아 국가의 유력 언론들도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하며 그의 발자취와 역사적 공헌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한일 관계가 크고 작은 파고를 겪으며 때로는 극심한 갈등과 반목의 상황에 놓이기도 하는 현시점에서,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도모하고자 했던 고노 전 의장의 거시적인 안목과 결연한 외교적 결단은 오늘날의 양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역사적 진실 앞에 겸허하고자 했던 1993년 ‘고노 담화’의 숭고한 정신은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역사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공존을 위한 가장 든든하고 확고한 초석으로 남아 있다. 스스로를 뼈대 깊은 ‘보수 정치인’이라 칭하면서도 보수 세력이 지켜내야 할 가장 핵심적이고 위대한 가치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 수호와 평화라는 것을 자신의 일생을 바쳐 몸소 실천해 보인 고노 요헤이. 그의 육신은 비록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한일 과거사 문제에 있어 진실을 비겁하게 외면하지 않고 양심과 정의의 목소리를 당당히 냈던 그의 훌륭하고 용기 있는 발자취는 한일 관계사는 물론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울림과 귀감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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